Monday, December 30, 2013

16. UCLA & MOCA에서 생긴일.

UCLA와 MOCA(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UCLA는 15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14명의 올림픽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는 명문대학이었고 난 내 또래의 미국 대학생들을 보고 싶었다. UCLA 캠퍼스중 내가 제일 먼저 간곳은 도서관이었는데 외부인인 나도 들어 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있는 학생들은 책을 보거나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에너지는 강렬했다. 미국에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내 또래들을 보니 난 무엇에 이들만큼 열중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난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가. 하버드와 예일 UCLA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과 만났을때 난 무엇을 자신있게 내놓을수 있을까. 한마디로 나의 차별화 포인트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없는 경험 즉 나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이 여행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 여행이 매력이 있고 가치가 있다. 이렇게 현장에 오니 더욱더 절실히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대학 스승님이신 윤준호교수님은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졸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학교에 진학한다고 생각하라 하셨다. 세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캠퍼스를 가진 학교이며 그 학교엔 셀 수 없는 많은 스승들이 있다. 그 가르침덕에 세상을 대하는 나의 관점이 전환되었다. 취업을 위해 한국에서 편입하는 대신 전세계라는 어마어마한 캠퍼스를 가진 학교에 다시 입학해 한국을 떠나 낯선 이 곳 미국까지 오게 된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캠퍼스를 걷던중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 가보았다. 조그만 무대가 있고 작은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는데 학생들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즐기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신이나 무슨 콘서트지인지 가까이 가보았다. 무대와 무대근처에 세워져있는 사진들을 보고 난 콘서트의 정체를 알수 있었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서명을 받는 콘서트였다. 이 콘서트는 내게 꽤나 충격이었다. 일종의 시위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콘서트는 비장함과 격렬함 대신 음악이 있었다. 동성결혼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 많은 민감한 사안들이 여러형태로 대중들에게 표출되고 공감을 얻으려 하지만 많은 경우가 대중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만다. 그런 상황을 보며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UCLA에서 봤던 이 작은 콘서트가 주는 시사점은 결코 작지 않았다.
UCLA를 나와 향한 LA의 현대미술관인 MOCA에 갔다. 미술관의 소장 작품은 물론 너무도 좋았다. 헌데 그보다 더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술관의 분위기였다. 작품들을 둘러보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미술관 로비에서 DJ음악이 울려퍼지기 시작하며 파티가 열렸다. 그리고 미술관 내부에서는 미니골프대회가 치러졌다. 미술관에서 골프대회라니! 미술관 곳곳에 특수 제작해 설치한 골프홀을 따라 다녀 보니 평소에는 오픈되지 않는 곳에도 들어 가볼수 있어 자연스레 미술관을 소개 받고 있는듯 했다. 그러면서도 미술관이 얼마나 친근하고 재미있는 곳인지 설명하는게 아니라 직접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

미국에와서 보니 미술은 쉽고 재밌고 친근한것이었다.




Friday, December 27, 2013

15. 젊으니까? 젊으니까!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 카운티뮤지엄에 가기위해 할리우드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메인스트리트와 스프링 스트리트가 교차되는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할지 갈피를 못잡던 중에 잘 차려입은 어느 흑인에게 길을 물었다. 그 사람은 말하길 "여기서 거리가 좀 있지만 당신은 젊으니까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거에요."
젊.으.니.까? 이 한마디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걷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흑인에게 소중한것을 깨닫게 해줘 고맙다는 듯 인사를 하고 가르쳐준 방향으로 젊음의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걸어간 길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주택가였고 이 길을 버스를 타고 지나쳤으면 어쩔뻔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나게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걷기를 30분, 한시간이 지났다.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꽤 걸었는데 미술관은 나오지 않아 발과 배낭을 멘 어깨가 너무 아파왔다. 걸어갈 수 있다해서 금방 갈줄 알았는데 걸어가보라고 했던 그 흑인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소중한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사람에서 이제는 원망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 30분을 더 걸었는데도 미술관은 나오지 않았고 길을 잘못들었거나 아직도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 난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계획대로 버스를 탔다면 몸도 힘들지 않고 시간도 아껴 미술관에서 여유롭게 작품을 관람했을텐데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몹시 허기지고 지쳐있던 난 근처 가게에 들어가 지도를 사서 현재 나의 위치가 어딘지 점원에게 물어 보며 돌아가는 버스를 알아봤다. 그래도 혹시 몰라 LA카운티 뮤지엄이 어디 있는지 점원에게 물었는데 여기서 5분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그걸 모르고 포기하려고 했던 난 어느새 배고픈것도 잊은채 다시 미술관으로 향했다. 계획보다 늦게 도착하면서 생각지도 않게 무료로 입장하는 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고 더군다나 늦은시간이라 사람도 많지 않아 여유롭게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미술관에는 현대 미술의 거장들 작품으로 가득차 있어 눈과 나의 지적욕구가 호사를 누릴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가서 그랬을까 LA카운티 뮤지엄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본 미술관중에 특히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다. 쉽고 빠르게 그리고 편하게 다녀왔어도 LA 카운티뮤지엄 자체가 워낙 좋은 미술관이었기 때문에 그 감동이 더하거나 덜하지는 않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여행하며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들은 한마디는 내게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날 들은 "당신은 젊으니까"란 한마디는 나의 젊은날에 젊음을 감사히 여길수 있게 만든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르네마그리뜨의 this is not a pipe
제프쿤스의 caterpillar ladder

Thursday, December 26, 2013

14.로저와의 만남


미국에 도착하고 첫 여정으로 미국의 석유재벌 폴 게티가 평생에 걸쳐 모은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게티센터에 가기로 했다. 게티센터는 내가 머문 산타모니카 비치 근처 유스호스텔에서 버스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유명작가의 예술작품을 볼 생각에 매우 들뜬 상태로 길을 나섰다.

게티센터는 듣던대로 소장작품의 규모가 실로 방대했고 당시 예술작품 구경에 막 관심을 가지던 내게 보물과 같은 곳이었다. 또한 한국의 여느 전시와는 달리 작품의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나는 모든 작품을 사진으로 담아 오려는 사람처럼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미술관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 작품 구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미술관에서 슬슬 폐장을 알리는 분위기의 영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느낌상으로 이제 집에 갈때가 됐다는 얘기였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숙소로 가는 마지막 버스시간이 몇시인지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티 미술관은 산위에 위치해있었고 버스타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도 얼마 없고 뭔가 잘못되가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늦게 내려오는 사람들중에 버스타러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자가용 주차장으로 향했다. 만약 숙소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미술관은 교외지역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만해도 앞이 깜깜해질 노릇이었다. 아까 미술관에 올때의 그 설레임은 온데 간데 없고 두려움과 밀려오는 걱정들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빠른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두세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은 안심이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그 중의 착하게 생긴 아저씨에게 산타모니카쪽으로 가는 버스가 아직 있냐고 물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 아저씨도 그 쪽으로 간다고 했고 아직 마지막 버스가 안온거 같다고 했다. 얼마나 기쁘던지 아저씨에게 연신 땡큐 땡큐하며 감사인사를 했다.

아저씨의 이름은 로져, 근처 식물원에서 일하고 집으로 가는길이라고 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대화를 하던중 너무나도 반가운 버스가 왔다. 버스에 타고서도 로저아저씨와 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미국에 오고 나서 이렇게 미국사람과 오래 얘기하는건 처음이라 그 동안 궁금한 것들을 로져에게 많이 물었다. 다행히도 로져는 친절하게 나의 질문들에 답해 주었는데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대답이 있다. 대화를 나누던중 로져가 미국에 많은 도시에서 살아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난 그 중 어느 곳이 가장 살기 좋았냐고 물었다. 로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많은 도시에서 살아보니 가장 살기 좋았던 곳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이었던거 같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분명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유명 도시중 하나의 대답을 예상했는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겨나갔고 그의 대답은 내 마음에 큰 깨달음으로 날아왔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로져의 대답이 있는데 당시 난 LA 다음 목적지로 Texas 알링턴에 살고 있는 친구 현무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알링턴에 갈 때 기차를 타고 싶었지만 48시간동안 가도 별반 다를거 없는 풍경이니 기차 타지말라는 어떤 경험자의 글을 인터넷 까페에서 본적이 있던 나는 고민을 로져에게 물었다.

로져는 잠시 생각하더니 본인에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기차를 타고 가고 싶다고 했다. LA에서 알링턴까지 비행기를 타면 몇시간이면 도착하지만 기차로는 48시간동안 달려야 하고 창밖의 풍경도 별 다를것 없이 계속되 분명 지루함도 생길것이다. 그런데 기차로 이틀을 달려 반도 가지 못하는 넓은 땅을 가진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이런 광활함을 느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보다도 이틀동안 달리며 잠깐 잠깐씩 기차가 설때 역에 내려서 그 지역에서 볕을 쬐고 냄새를 맡고 공기를 마시며 잠깐이라도 그 지역을 경험하는 것은 기차 여행자만이 할수 있는 경험이다. 이 얘기에 내가 어떻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까.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그가 남긴 여운은 지금까지도 내게 유효하다. 요즘 나의 고민을 듣는다면 로져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 진다.


Thursday, July 25, 2013

13. 미국입국

LAX 공항

입국심사관 : 얼마나 미국에 머무를 예정이죠?
-나 : 6개월 정도요.
입국심사관 : 6개월이요? 어떤목적으로 왔는데요? (무언가 미심쩍은듯)
-나 : 여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입국심사관 : 6개월동안이나 여행을 한다구요? 당신 직업이 뭔데요?
-나 : 아 저는 광고기획하는 일을 합니다.
입국심사관 : 당신은 지금 회사에 소속되어 있나요?
-나 : (어디 소속이 안되어 있다면 불법체류할 사람으로 의심할거 같아서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소속되어 있다고 거짓말했다.) 네 회사에 소속되어 있어요.
입국심사관 : 회사의 사장이 누군데요? 

-나 : (회사의 사장이 누구냐고? 당황스러웠지만 웃으며 매우 친절하게 사장님의 이름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과 무슨관계냐고 다시 묻는다. 사장과 직원관계라고 얘기했더니 아니 무슨 회사길래 6개월동안 여행을 다닐 수 있는거냐고 또 묻는다. (아 뭐가 궁금한지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풍부해야 하는데 우리는 여행을 통해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요. 이번에 6개월동안 미국여행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거에요. 내가 생각해도 이걸 영어로 설명했다는게 놀랍지만 입국심사관은 내가 웃으면서 안되는 영어로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모습에 억지로 이해된듯 했다. 이정도면 입국심사가 마무리 될줄 알았더니 다시 질문이 시작되었다.

입국심사관 : 6개월동안 여행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텐데 돈은 충분한가요? (경계를 풀지 않은듯 하다)
-나 : 일단 한두달 체류할 돈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가족들이 송금해줄 예정이에요. 한꺼번에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면 위험할지도 몰라서요.(사실 돈은 지금 가진게 전부였다.)
입국심사관 : LA에서는 어디서 머물예정입니까?

-나 : 원래 재워주기로 했던 친구가 연락이 두절되면서 머물곳을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물어본 질문에 혹시 몰라 여자친구가 적어준 여자친구부모님댁 주소가 생각나 여자친구 부모님댁에서 머무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입국심사관은 또 의아해 하며 여자친구가 미국에 살고 있냐고 묻는다. 난 그렇다고 말하니 입국심사관은 여자친구가 미국사람이냐고 다시 물었고 난 그녀는 미국 시민이고 그녀의 부모님은 한국사람이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입국심사관은 갑자기 너 바나나 있구나하는것 아닌가. 바나나? 난 바나나를 안가지고 있다. 입국심사할때 먹을거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바나나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에 정말 결백하다는 듯이 바나나가 없다고 얘기했다. 입국심사관은 바나나를 중얼거리며 입국도장을 내 여권에 찍어주었다. 

약 2~30분에 걸친 진땀나는 입국심사를 통과했다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바나나얘기가 뭔가 찝찝했다. 갑자기 바나나얘기를 왜 꺼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나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을 일컫는 속어였다. 어쨌든 미국에 무사히 입국했고 공항밖으로 나오니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햇살과 습도가 느껴지면서 미국에 온것이 실감났다. 어제까지만해도 한국에 있었고 겨울이었는데 단 하루만에 따뜻한 미국에 오다니! 감탄도 잠시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유스호스텔로 가기위해서 버스 타는곳을 찾아야 하는데 버스정류장이라고 보이는 곳은 없었다. 주변사람들은 모두 가족이나 지인들이 배웅나와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라 길 묻기도 애매했다. 한번도 와보지 않은곳에서 처음가보는곳에 가기위해 어쩔줄모르고 있다가 용기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산타모니카 비치에 어떻게 가냐고 물었더니 공항셔틀버스를 타고 나가서 다시 버스를 타야한단다. 결국 셔틀버스타는곳을 알아내 버스를 탔다. 공항셔틀버스라 그런가 버스 운전기사석이 무척 높았고 운전석엔 타는손님들에게 정말 반갑게 인사해주는 흑인아줌마기사님이 있었다. 우피골드버그를 닮은 버스기사는 무언가 좋은일이 있는지 정말 밝은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공항셔틀버스는 한국의 지하철처럼 마주보고 있는 형태였다.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가진 동양사람이라 그랬는지 배낭여행객이라 그랬는지 맞은편 미국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많은듯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 내게 미국에 여행왔냐고 물었고 난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처음으로 미국에 왔고 2년동안 여행을 할건데 오늘이 그 첫번째 날이라고 덧붙였다. 내 대답에 승객들모두가 놀라는거 같았다. 버스 승객전부가 나의 이야기로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다. 2년동안 여행을 한다는 사람이 많은건 아니니까 그렇게 승객들과 짧은 대화를 하며 내가 갈아탈 버스가 오는 정류장에 승객 몇명과 내렸고 같이 내린 승객중 하나가 내가 타야할 버스를 가르쳐주었다. 정류장에 내려 몇십미터를 걸었을까 뒤에서 버스 경적소리가 빵~빵~하고 울려 돌아보니 공항셔틀버스였다. 그 밝고 경쾌한 에너지를 가진 흑인버스기사는 문을 열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멀리서 흔드는 그녀의 손짓은 앞으로 건강하게 여행잘하고 네가 원하는것을 꼭 찾길바래!라고 말하는거 같았다. 나도 그녀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공항에 입국할때까지만 해도 입국심사관의 까다로움에 미국사람들이 영 별로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버스기사와 길을 친절히 가르쳐주는 사람들때문에 미국은 정말 친절한 나라가 되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내가 뭘먹고 뭘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Thursday, July 11, 2013

12. 2009년 2월 27일

인천공항에서 9시 비행기를 타기위해 새벽 첫차를 타러 가는길 부모님이 집 근처의 전철역까지 배웅해 주셨다. 사실 엄마는 내가 군대갈때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녀오라고 보내주셨던 분인데 이번엔 눈시울을 붉히셨다. 눈시울이 빨개진 엄마를 보니 나도 울먹거릴거 같아 얼른 포옹을 하고 서둘러 지하철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곧 도착한 전동차 칸에 사람이 거의 없는걸 확인하니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엄마 앞에서 약해진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 무모한 도전과도 같은 이 여행은 너무 무섭고 떨리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돈도 충분하지 않고 외국에 친척이나 아는사람도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은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결정한 가장 큰 도전이었기에 감당하기 벅찬 부분이 있었던 거 같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난 이 여행을 통해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길 간절히 바랬기에 더욱더 이 여행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너무 큰 의미를 담았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비장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떠나기전 수많은 장애물들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것은 내가 감내해야 했다. 다행히도 여자친구는 내가 떠난후 약 열흘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LA로 올것이고 우린 곧 만나게 된다. 공항에서 날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여자친구를 생각하니 이내 곧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살아 돌아 오기만 한다면 성공이란 생각을 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Wednesday, July 10, 2013

11. 한마디의 힘.

출국 하루전 배진환 교수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의 첫 수업시간 안도타다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던것이 어느새 일년 육개월전의 일이었다.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에 떠나기로 마음먹을수 있었다고 감사인사를 드리자 교수님은 또 한번 깊게 기억될 이야기를 해주셨다.

"세상에 큰 인물들에게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2~3년의 공백이 있다. 아마 이번 여행이 우성이 너에게 그 시간이 될거 같다."

이 한마디가 후에 여행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떠올라 날 지탱해 준 큰 힘이 될줄은 난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Tuesday, July 9, 2013

10. 사람이 재산.

미국으로의 출국을 2주정도 앞두고 그 동안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고 해주신 경훈선배를 만나 식사를 했다. 경훈선배를 처음 만난지도 어느새 일년, 공장에서 경비를 할때도 허교수님프로젝트에 참여할때도 선배를 만나며 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미국으로 떠난다고 선배를 찾아갔을때 선배는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나의 선택에 진심으로 기뻐해주셨다. 식사를 마치고 선배는 내게 택시타고 가라며 봉투를 하나 주셨고 친형님의 연락처도 알려주시며 뉴욕에 가면 꼭 연락해보라며 건투를 빌어 주셨다.

집에 돌아와 선배가 준 봉투를 열어보니 택시비라고 주신 봉투엔 100만원이 들어있었다. 선배에게 전활 걸어 봉투에 대해 이야기하니 선배는 여행하며 꼭 필요할거라며 받아두라고 하셨다. 당시 나에게 이 돈은 1000만원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1년전 특강에서 한 학생이 선배에게 질문을 했던것이 기억난다.

학생 : 지금 가진 모든걸 잃고 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경훈선배 : 전 지금 망해도 다시 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일어설거 같아요. 저의 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거든요.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떠난다고 스스로 여겼지만 나에겐 항상 만나면 도전과 용기가 되는 후원자 김경훈 선배와 내 선택을 지지하는 여자친구 그리고 가족, 부랄친구 경민등 나에게도 큰 재산인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